봉선화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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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회

 

봉선화 삼십여 포기를 옮겨 심었다.

작년에 이웃집에서 얻어온 봉선화 두 포기를 마당가에 심었었다. 마당을 쓸 때 떨어졌던 봉선화 씨앗들이 텃밭으로 옮겨갔었나 보다. 텁수룩하게 자란 치마아욱 밭을 매주며 고욤나무 싹을 뽑아내다 보니 비슷한데 조금 다른 싹이 있었다. 기억 하나가 스르륵 자동문처럼 열렸다. , 작년에 내가 봉선화를 옮겨 심었었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봉선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꽃이 피었을 땐 앞에 쭈그려 앉아 자세히 살펴도 보고 톡 터지는 통통한 씨앗 주머니를 만져도 보지 않았던가. 떨어진 꽃잎들을 치우지 않고 지켜보며, 초등학교 시절 대운동회가 끝난 후 운동장에 흩어져 있던 붉은 풍선 쪼가리들을 떠올려도 보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이었던가. 더운 날도 차가운 봉선화 꽃잎을 만져보며 시를 한 편 쓰기도 했었지.

 

 

꽃이 마음을 만져주어

 

꽃이 마음을 만져주어

꽃이 마음을 만져주어

꽃이 마음을 만져주어

 

꽃에게로 다가가

꽃에게로 다가가

꽃에게로 다가가

 

꽃을 만져보면

빛깔도 곱다

빛깔도 곱기도 해라

 

꽃을 만지다가

꽃을 만지다가

빛깔을 만질 수 있다니!

 

꽃이 나를 만져주어

꽃이 나를 만져주어

꽃이 나를 만져주어

 

 

날이 너무 가물어 옮겨 심을 때 실뿌리가 끊긴 봉선화가 한낮이면 시들었다. 조로 통을 하나 사며 다른 물건을 살 때보다 기분이 뿌듯해졌다. 목마른 봉선화에게 물을 뿌려주며 나는 내가 마치 생명을 보살피는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맘이 달뜨기도 했다. 가문 땅은 물을 쭉쭉 빨아들였다. 시든 봉선화 이파리가 곧 싱싱하게 살아날 것 같고 부쩍부쩍 자라 금방 꽃을 피울 것 같았다.

백반의 맛은 시금털털했다. 누이와 누이 친구들은 초저녁에 모여 봉선화물을 들였다. 꽃잎과 얼음 쪼가리처럼 생긴 백반을 넣고 빻았다. 꽃잎 비린내와 백반 시큼한 내가 널평상에 퍼졌다. 백반 부스러기를 얻어 혀끝으로 녹이면 입에 침이 고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이 시큼시큼 빛나고 내 표정이 우스꽝스러웠던지 누이들 웃음소리가 몇 됫박 쏟아졌다. 손끝에 아주까리 잎으로 봉숭아 잎을 싸맨 누이가 손가락을 곧게 펴고 조심조심 내 새끼손가락에도 봉숭아 찧은 꽃잎을 올려놓고 아주까리 잎으로 감싼 다음 광목실로 칭칭 동여매주었다. 너는 남자니까 새끼손톱만 물들이는 거라고 하며 누이는 내 손가락이 동여맨 광목실에 너무 조여지지나 않나 아주까리 잎 감은 손가락으로 슬쩍 돌려보았다. 내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그 적당한 헐거움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누이의 정성은 대부분 정성으로 끝났다. 잠에서 깨어나 봉선화물이 잘 들었나 손가락을 살펴보는 순간 나는 실망하며 내 험한 잠버릇을 원망했다. 손가락을 감싸고 있어야 할 아주까리 잎이 납작한 골무가 되어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내 손가락이 아닌 베개가 봉선화에 물들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려 첫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첫눈 오는 날까지 베개에 물든 봉숭아물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베개는 첫사랑을 이룰 것 같았다. 나는 성가시게 달겨드는 파리를 쫓으며 신기 남은 손가락을 빨았다.

봉선화는 꽃잎이 봉황을 닮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식물을 동물에 비교하여 표현한 봉선화에 물을 주며 나는 감성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감성은 열림이며 여림이고 스밈이지 닫힘, 억셈, 반사가 아닌 것 같다. 식물의 경계를 열어 동물의 이미지를 이름으로 받아들인 봉선화. 여려서 작은 씨앗 많이 만드는 봉선화. 딱딱한 손톱에도 붉게 스며들어주던 봉선화. 손가락이 아닌 내 마음에 봉선화가 오래도록 물들어 있는 것은 이런 힘들이 아닐까. 꽃처럼 거부하지 않고 무엇이든 포용하고 끌어당기는 힘을 감성의 힘이라고 믿어보면 안 될까.

내 주위에 나를 물들이고 싶은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내가 열린 만큼 내가 물들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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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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