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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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회

 

귀밝이술이나 한잔해요, 형님.

자넨, 일 년 열두 달 귀밝이술인가.

형님은 열두 시만 넘으면 석양주 먹자고 하시잖아요.

 

정처 없이 흘러간다, 술자리 화제는. 대개 처음엔 공통의 화제로 출발한다. 이때는 서로 의견이 대립되기도 한다. 그쯤이면 누군가 슬쩍 화제를 바꾼다. 이제 추억 얘기가 주 무대로 등장한다. 추억 얘기도 처음엔 공유하고 있는 얘기, 누군가 맞장구 쳐주는 이야기들을 한다. 그러다가 상대편이 모르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지난 묵은 이야기로 상대에게 새로움을 던져주고 싶은 것이다. 상대가 모를 것 같은 이야기를 각자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놓으며, 자기 전유물인 추억이 빛나길 바란다. 이 대화의 방식은 좀 특이하다. 남이 알고 있는 이야기면 재미가 없다. 아주 낯설어 상대가 동조하지 못할 때 이야기가 더 큰 생명력을 얻는다.

 

그날 나와 동네 엄익선 형과의 술자리도 그러했다.

제 친구 중에 연립주택에 사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요, 베란다에 뭘 찾으러 나갔다 보니까 아 글쎄, 페트병에 얼음이 얼어 있더래요. 얼음을 들여다보니까, 미꾸라지 한 마리가 박혀 있지 뭐랍니까. 아이들이 잡아다놓은 미꾸라지가 얼어 죽은 거지 뭐예요. 그걸 깜박 잊고 있다가 봄에 베란다 청소를 하다가 보니까, 미꾸라지가 살아서 움직이더래요.

예이, 이 사람, 술이나 들어.”

글쎄, 그 이야기를 섬진강이 고향인 친구한테 들려줬더니, 그 친구가 갑자기 송사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옛날에 개울에 송사리가 많았잖아요. 형님, 여기 강화도는 개울이 없어 개울 잘 모르시죠. 하여간 그 친구가 어려서 본 건데요, 왜 양잿물 사다가 쌀겨로 만든 비누로 빨래를 빨면, 때가 개울에 둥둥 떠내려가잖아요. 그 때를 먹으려고 송사리 떼가 새까맣게 모여들더래요. 그러니까 그 송사리 잡아먹으려고 오리들이 몰려드는데, 오리들 깃털에 배어 있는 기름기가 비눗물에 다 빠져, 오리가 물에 둥둥 뜨지 못하고 장난치는 것처럼 물에 폭폭 자꾸 빠지더래요.

형님 한 잔 드시죠.”

나는 의도적으로 바닷가 태생인 엄익선 형이 모를 만한 민물고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술을 한 잔 털어 넣은 엄익선 형이 예상한 대로 바닷가 이야기로 응수해왔다.

 

옛날에 말야, 모시조개를 잡으면 지게에 짊어지고 여기서 초지진까지 한 세 시간을 걸어갔어. 그런 다음 배를 타고 대명리로 건너가, 한 두세 시간을 더 걸어 양곡이나 김포까지 가서 팔았거든. 그런데 말야, 고개 너머 할아버지 한 분이 양곡으로 모시조개를 팔러 갔는데, 개가 한 마리 덤벼들어 다리를 확 물더래. 지게를 받쳐놓고 물린 곳을 살피고 있으니까, 개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미안하다고 말하며, 한 번에 조개를 떨이로 다 사주더래. 그러니 조개를 지고 여기저기 다닐 필요도 없게 되었지 뭐야. 그 할아버지가 빈 지게를 지고 돌아오는데 물린 다리는 좀 아파도 발걸음이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지 뭐야. 그땐 요 앞 뻘만 나가도 모시조개가 많았지. 저기, 성엣장(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얼음덩이. 이곳 사람들은 물이 빠졌을 때 바닷가에 언 얼음덩이를 그렇게 부름)이 난 앞에도 조개가 있었다고. 그땐 말야, 물이 들어오면 성엣장이 떠오르잖아. 그러면 삿대를 가지고 올라타서 그 성엣장을 타고 놀았다고. 이 성엣장에서 저 성엣장으로 건너뛰기도 하며. 그러다가 말야, 썰물이 져 물이 날 때는 자꾸 바다 쪽으로 성엣장이 떠내려가는 거 있지. 그땐 환장하지. 자넨, 그 심정 모를 거야.

, 술이나 한잔해. 올해는 망둥이도 없고. 겨울철 안주는 망둥이 말려놓은 게 최곤데.”

옛날엔 말야, 망둥이 몇 마리 들고 술병 하나 차고 산에 올라가 구워 먹었어. 생선은 산에서 먹는 게 맛있잖아. 망둥이도 산에서 구워 먹는 게 제일 맛있었지. 겨우내 눈이 쌓여 있었으니까, 산불 날 염려도 없었지. 소나무 밑 젖지 않은 솔 검불을 걷어다가 불을 놓아 망둥이를 굽는 거지. 바싹 안 익어도 좋아. 그냥 솔 연기를 쬐기만 해도 되지. 참 좋은 안주였는데.

그렇지요, 형님. 옛날에 눈이 정말 많이 내렸지요.”

우리도 산에 올라가 얼어 죽은 비둘기, 까치를 주워 구워 먹었어요. 한겨울 내내 눈이 쌓여 있다가 봄이 되어야 녹는 거였잖아요. 그런데 말여요, 여기 강화도 산에는 고려산 말고는 자작나무가 없잖아요. 우린 그 자작나무 껍질로 불을 붙였어요. 자작나무 껍질은 빗물에도 안 젖고 한겨울에도 잘 탔거든요.

 

농기구들과 연장이 진열되어 있는 허름한 개방형 창고에서 숯불을 지펴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엄익선 형이 손수 만든 유리 탁자에 빈 술병 서너 병이 놓였을 때다. 형의 이야기에 나이 어린, 세월을 덜 산, 내가 맞장구를 치자 형은 생각에 잠시 잠겼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얼굴 표정을 밝히며 술잔을 꺾고 아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시로 썼다. 시를 쓰며 추억에도 개인이 간직하고 싶은 소유권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파 씨 두서너 알

 

동네옛이야기에 맞장구를 치자

자넨 고향이 뭍이니까 이건 모를걸

 

조개로 벌 잡아봤어 아니다 조개껍데기로

야하이 사람 모르는구먼

모시조개는 울림통이 좁고 가무락이 움푹하고 좋아

엄지와 검지로 벌려진 조개껍데기를 적당히 눌러 잡고

파 꽃에 앉은 벌을 탁, 가둬 잡는 거지

조개껍데기를 귀에 갖다가 대면

벌 소리가 기, 귀가 막히지

, , 이때

파 씨 두서너 알을, 두서너 알이다

닫히는 조개껍데기 틈새에 끼워야 해

그게 고수지

그래야 벌 소리가 제대로지

이렇게 말야 이렇게 귀에 갖다가 대면 말야

 

건너에 술 취한 소년이 앉아 있네

소년이 듣는 벌 소리에 나도 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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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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